K모임 발제문

제목: K모임 발제문 왜 명상 해야 하는가? 명상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 가운데 하나이다. 명상의 방법이나 수행, 또는 어떤 특정한 체계에 따른 명상이 중요하다는 것보다는 명상 그 자체가 갖는 특별함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만일 누구든지 스스로의 힘으로 명상의 의미와 필요성과 중요성을 찾아낸다면, 그는 동양적인 유형의 명상 속에 포함된 모든 특별한 것들을 비롯한 모든 제도와 방법과 구루를 내던져도 무방하다. 혼자의 힘으로 자신이 실제로 무엇인가를 밝혀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만 그것은 심리학자들이나 철학자들, 구루들의 이론과 경험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전체적인 본성과 움직임을 깊이 탐구하고 자신이 정말로 무엇인가를 보는 것에 의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자신이 실제로 무엇인가를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그것은 심리적으로 마치 거울 속에 비친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구조에 일대 변형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근본적이고 깊이 있게 그러한 변형내지 대체를 가져올 때 그 변형은 그 사람의 의식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것은 절대적인 사실이며, 실체적인 것이다. 만일 누구든지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현재의 세계와 혼란, 불확실성, 불행 및 수많은 종교와 민족의 분열, 그리고 민족 등과 같은 대의명분을 걸고 이루어지는 수많은 전쟁과 군비증강, 전쟁 준비를 위한 막대한 경비 지출 등등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다면, 근본적인 변형을 가져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자신이 실제로 무엇인가를 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유가 있어야 하며, 이 자유는 그 사람의 의식이 담고 있는 모든 내용물로부터 벗어나는 그러한 자유이다. 이러한 자유가 필요한 이유는 의식의 내용물이란 사고에 의해서 결합된 모든 것들이기 때문이다. 의식의 내용으로부터의 자유, 분노와 야만성으로부터의 자유, 허영과 교만으로부터의 자유, 그리하여 결국 자신을 붙들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서 얻어지는 자유가 곧 명상이다. 자신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바로 그 행위야말로 변형의 시작인 것이다. 명상은 모든 투쟁과 갈등을 내부적으로 ,그리고 그 결과로 외부적으로도 종결 시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사실상 내부나 외부와 같은 구별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밀물과 썰물이 있게 마련인 바다와 같은 것이다. 자신이 과연 실제로 무엇인가를 밝혀가는 과정 속에서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지게 될 것이다. 관찰자는 과연 자신이 관찰하는 것과 다른 것인가? 나는 분노하고 있고, 탐욕스러우며, 난폭하다. 그런데 그러한 내가 분노, 탐욕, 폭력 자체인 관찰되는 대상과 다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정말 다른 것인가? 분명히 그렇지 않다. 내가 분노를 터뜨렸을 때, 분노한 ‘나’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분노만이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분노는 바로 나이며, 따라서 관찰자는 곧 피관찰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한 구분이 완전히 배제된다. 관찰자는 피관찰자이며, 그리하여 갈등은 이제 그 막을 내린다. 명상은 내면적으로나 외면적으로 모든 갈등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다. 갈등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원리를 이해해야 한다. 즉 심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 관찰자는 관찰되는 대상과 다르지 않다. 분노가 있을 때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극히 짧은 시간이 흐른 뒤 사고가 ‘나’를 만들어 내면, ‘나는 화가 나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화를 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제 분노와 화를 내서는 안 되는 ‘나’가 존재한다. 바로 그러한 구분이 갈등을 초래한다. 관찰자와 피관찰자 사이에 아무런 구분도 존재하지 않을 때 그리하여 오직 분노만이 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분노가 계속 되는가? 아니면 분노가 완전히 종식 되는가? 분노가 발생하여 아무런 관찰자나 구분도 없을 때 그 분노는 활활 타오르다가 사라지게 된다. 마치 피고 지고 시들어 버리는 한 송이 꽃처럼. 그러나 그 분노와 싸우고 있거나, 저항하거나, 합리화하려고 하는 한 그것은 분노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고 있는 것이다. 관찰자가 곧 관찰되는 대상일 때, 분노는 활짝 피어 절정에 달했다가 저절로 사라져 버린다. 그러므로 그 자리에는 이제 그 어떠한 심리적 갈등도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당신은 행동에 의해서 살아간다. 그것은 특정한 동기에 따르거나, 이상에 따르거나, 아니면 전통과 관습에 따른 것이다. 명상 상태에 들어가 있는 마음은 행동이 무엇인가를 찾아내야 한다. 갈등은 인생에 있어서 주요한 문제들 가운데 하나이며 그 갈등으로부터 모든 종류의 강박적 행동이 일어난다. 갈등을 종결시켜서 강박적 행동을 끝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당신은 건전하고 건강하며 신념이나 공포 같은 것에 얽매여 있지 않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즉 어떠한 원리에 따라서 어떠한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행동할 것인가? 보통 사람들은 기억으로부터 행동한다. 기억은 일정한 유형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결국에는 습관화되고 만다. 사람들은 즐겁게 기억된 것에 따라 행동한다. 행동에는 다양한 유형이 있으며 그 각각은 모두 불완전하며 분열되어 있다. 그 어떤 것도 신성하지 않다. “나는 사업가이며, 가정에 가면 자녀들을 사랑한다. 하지만 사업상의 문제라면 어느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 오직 이익만이 있을 뿐이다.” 유명한 화가일 수도 있다. “비록 뛰어난 재능을 갖춘 화가지만 내 삶은 허울뿐이다. 탐욕스럽고 사악하며, 돈과 지위와 인정과 명성만을 바랄 뿐이다.” 당신의 갖가지 행동들은 제각기 나뉘어져 있다. 단편적인 행동이 존재할 때 그 행동은 필연적으로 심리적인 갈등을 가져오게 된다. 갈등도 없고 실패와 후회와 좌절감도 없는 행동이 있는가? 또한 전체적이고 조화로우며 완전한 행동이 있는가? 어떤 특정한 분야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행동이 있는가? 당신은 자신이 실제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자신이 실제로 얼마나 모순된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만일 그것을 완벽하게 의식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만일 내가 상호 모순된 행동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당신이 나에게 “그것을 의식하라.”고 말한다면 나는 “도대체 의식한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고 되물을 것이다. 선택을 할 때는 의식한다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다시 말해서 “나는 저런 특정한 행동이 좋으니까 저것을 계속 지키고 싶다 제발 다른 행동은 피하게 해 달라”고 말할 때 알아차림은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결코 의식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가장 만족스럽고 좋은 보답이 있을 것 같은 특정한 행동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선택이 있는 곳에서는 결코 완전한 알아차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어떤 사람이 완전히 의식했다면 이제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이다. 그러면 어떠한 끊어짐도 없는 지속적인 행동이 나타나게 된다. 그것은 건전한 마음을 갖는 것인데 그 어떠한 형태의 신념이나 도그마 내지 이상도 갖지 않는다는 뜻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또한 그것은 명쾌하고 직접적이고 객관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명상의 과정 속에서 사람들은 바로 그러한 행동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명상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모든 기존의 지식을 던져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탐구를 가로막기 때문이다. 심리적인 권위로부터 자유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한 조사에는 무엇이 필요한가? 집중? 주의력? 알아차림? 당신이 집중을 할 때 당신의 모든 에너지는 특정한 어떤 것에 맞추어진다. 그리고 중간에 끼어드는 모든 생각들을 거부하고 밀어낸다. 분명 집중 속에는 거부와 저항이 존재한다. 그러나 사고를 의식하는 데 있어서는 집중이 존재하지 않는다. 알아차림 속에는 어떤 사고를 좋아할 것인가 따위의 선택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알아차림에서 관심이 나타난다. 관심에는 주의를 기울이는 기준이 되는 중심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반드시 이해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며, 명상의 본질이다. 집중에는 어떤 관념이나 이미지에 근거한 집중의 중심이 존재한다. 당신은 집중 속에서 벽을 쌓고 저항하기 위하여 에너지를 사용한다. 그리하여 다른 어떠한 들어올 수 없으며 따라서 갈등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한 갈등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사고의 알아차림을 수반하게 된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모순이 없으며, 어떤 사고에 대한 저항도 없는 것이다. 자신의 사고가 움직이는 모든 형태의 운동에 대한 알아차림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한 알아차림으로부터 관심이 싹튼다. 진정으로 무엇인가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을 때, 그 자리에는 이미 나와 같은 중심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관심을 기울이면서 당신은 모든 복잡한 사고와, 공포, 고뇌, 절망 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그것이 기초인 것이다. 당신은 의식 속에 담긴 내용물이 비워지면서 해방이 된다.그러므로 명상은 의식이 담고있는 내용물을 비워내는 것이다. 모든 알맹이를 비워내는 것이야말로 명상의 의미이자 심도이다. 그리하여 사고는 이제 종말을 고하게 된다. 명상은 관심이며 그 관심 속에는 아무런 등록물도 존재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두뇌는 모든 것, 즉 사용되고 있는 무수한 말들과 소음까지도 등록시키고 있다. 마치 녹음테이프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제 두뇌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 이외의 것을 등록시키지 않을 수 있을까? 왜 나는 모욕을 등록해야 하나? 어째서, 왜 나는 아첨을 등록해야 하나? 그건 전혀 불필요한데도. 왜 나는 상처를 등록해야 하나? 필요도 없는데. 매일 매일의 생활 속에서 제대로 움직이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만을 등록시키고 다른 것은 등록시키지 마라. 명상에는 심리적으로 볼 때 등록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살아가고 사무실에 출근하고 공장에서 일하는 등의 실천적인 사실들 이외에는 전혀 등록되어 있지 않다. 아무것도. 그로부터 완전한 침묵이 나타난다. 왜냐하면 사고가 이미 종식되었기 때문이다. 오직 한 가지 필요한 경우에만 제 기능을 발휘할 따름이다. 시간도 종식되었기 때문에 이제 완전히 다른 종류의 운동이 존재하게 된다. 그때, 종교는 전적으로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그 이전에는 종교란 사고의 문제였던 것이다. 사고는 수많은 종교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각각의 종교는 분열되었으며 그러한 분열 하나하나마다 또다시 다수의 하위 분열들이 자리 잡게 되었다. 다른 세계에서 지내고 싶은 욕망과 희망 공포 신념 등을 포함하여 종교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것은 사고의 결과이다. 그것은 종교가 아니라 안전을 찾고자 하거나 희망하거나 두려워하는데서 이루어지는 사고의 운동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물질적 과정인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종교인가? 신성한 것을 찾아내고 성스러운 것에 도달하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관심과 에너지를 집중시켜서 행하는 탐구가 종교인 것이다. 그것은 온갖 시끄러운 온갖 사고로부터의 자유가 있을 때에만 일어날 수 있다. 그것은 심리적으로 내면의 시간과 사고를 종결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지식을 가지고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세계 속에서의 지식을 종결시키는 것은 아니다. 신성하고 성스럽고 진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두뇌가 사고를 사고 자체의 적절한 위치에 놓아두었을 때 그리고 완전한 침묵이 존재할 때 나타나는 것이다. 그처럼 거대한 침묵으로부터 신성한 것의 존재가 자리를 잡게 된다. 침묵은 공간을 요구한다. 그 공간은 의식 전체 구조 속에 존재하고 있다. 사람의 의식 그 자체의 구조 속에는 아무런 공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수많은 공포와 쓸데없는 지껄임으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침묵이 존재할 때 시간을 초월한 공간이 자리 잡게 된다. 오직 그때라야만 영원하고 신성한 것에 도달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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